<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 고통

chillax | 2024.04.19 15:37:26 댓글: 0 조회: 794 추천: 2
분류교양서적 https://life.moyiza.kr/fiction/4562426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마흔, 왜 인생이 괴로운가



삶은 전부 의지에 달려 있다
[고통]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자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가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고약한 고통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1분 1초가 아까울 만큼 두려운 죽음일 수도 있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쇼펜하우어에게 가장 큰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염증만큼 컸던 삶에 대한 애착이었다.
쇼펜하우어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발사에게 면도를 시키지 않았다. 화재가 날까 봐 2층 방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탄환을 넣고 권총을 침대 옆에 두고 잤다.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1831년에는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지자 프랑크프르트로 도망가다시피 했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4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쇼펜하우어의 깨달음에 공감할 것이다. 삶의 욕망 자체가 고통이라는 가르침을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표현한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인 존재다. 그러므로 욕망, 집착, 소유욕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명성, 권력, 지식 등은 내가 죽으면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욕망의 파도를 잘 다스리는 것이 마음의 행복을 얻는 출발점이다. 어두운 고통의 바다에서 눈을 뜨고 검은 파도를 들여다보라. 행복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가려진 삶의 어 두운 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심연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사가 고통의 연속인 이유를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 때ㅜㄴ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로 보고, 영원히 살려는 맹목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인간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인간 본성의 욕망이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과 함께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맹목적인 열망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런 욕망을 잘 다스릴 때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봤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본능이다

삶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타성과 관성이라는 점에서 불행의 원인이 되지만 삶의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성과 본응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행복도 이 두 원리에 근거해서 주장됐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행복일 때 그것은 이성에 맞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행복을 정의할 때 식물,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이성에 주목했다. 지혜로 운 인간의 영혼의 탁월성이 있다고 했다. 즉 이성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성에 따라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사는 것이 잘사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행복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본능의 관점에서 환상이잦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고 봤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인생이라는 기창가 기관사(이성) 없이 삶에 대한 욕망(동력)에 이끌려 달려가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정신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충동에 떠밀려 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다는 삶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악착같은 욕망을 나타낸 말이다. 생명력이라는게 얼마나 강인한지를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식물에 비유한다.

"마른 씨앗은 3,00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유리한 환경이 생기는 식물로 성장한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계속 운동하려는 작용의 힘처럼 인간은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서 끝까지 남기를 바란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의 본질이 합리성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삶에 대한 애착과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를 달리게 한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죽음에 의해 좌절된다. 그래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려고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얻지만, 그 결과는 완벽한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다.



고통을 깨달아야
인생을 깨닫는다

마흔 이후부터는 인생에 대한 생각의 전환, 행복과 고통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쇼펜하우어처럼 행복을 위해 우리도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40대 중반이 넘어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에게 마흔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인내하면서 넘어야 할 인생의 위기이자 전환점이었다. 그가 40대에 포기했다면 명성도, 행복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풍부한 경험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필요하다. 현상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자양분으로 만들 수 있는 성숙의 조건이 최소 40년이다. 청춘은 지혜롭지 못하지만 무모한 용기가 있다. 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인생의 쓴맛을 겪고 나면 시선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마흔 이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경험과 지식을 쌓고, 자기 통찰을 거듭해야 한다.

마흔부터 쾌락의 양을 늘려 나가기보다는 고통을 줄여 나가는 방법이 더 현명해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40대를 견디고 나서부터 70회 생일이 2년 지난 후 1860년 9월 21일 눈을 감을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후에나 인정받을 줄 알았던 그의 책이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적 명성을 얻은 덕분이다. 쇼펜하우어의 생전 마지막 모습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 고통 없이 온화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마흔의 쇼펜하우어가 앞으로 누릴 행복을 전혀 예감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미래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쇼펜하우어가 노년에 얻은 것은 명성과 부, 사회적인 인정이 아니라 내면의 깨달음, '삶의 지혜'였을 것이다.


인생은 우리가 영원히 고찰해야 하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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