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희 - 천사의 반란 4

3학년2반 | 2022.02.01 08:30:35 댓글: 0 조회: 66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184

13. 속초에서 인천까지
김포국제공항 신청사의 귀빈실은 품위와
격조있는 분위기의 실내장식으로 별세계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공항귀빈실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혼잡의 극치를 이루는 살풍경한 공항
로비와는 전혀 다른 아늑한
휴식공간이었다.
김석기는 잠시후 벌어질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입가로 은근한 미소를
흘렸다.
귀빈실에서 김석기뿐만이 아니라 각
매스컴의 기사 수십명이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폭풍전야의 고요, 바로 그랬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차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말소리를 낮추어
밀담을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TV카메라 기자는 녹화용 기자재를
설치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잠시후 LA발
KAL002기편으로 입국할 한미
의원친선협의회 한국측의원들의
귀국기자회견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김석기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었다. 그가
소속된 부서가 사회부이다 보니
정치부기자들이 단골로 출입하는
공항귀빈실도 처음 밟아보는 터였지만
내노라는 정객들과 맞대면해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미 의원친선협의회 한국측 대표인
성기용의원과 면담이 그의 숨은
목적이었다.
신문사의 정치부장을 졸라 어렵게
참석한 자리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김석기는
벌써 가슴이 설렝다. 사실 그에겐
목표달성보다는 성기용의원의 반응을
살펴보는데 숨은 뜻이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항램프와 연결된 도어가 열리면서
귀빈실로 들어서는 의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대표답게 성기용의원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스처와 함께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자, 기자 여러분. 숨 좀 돌립시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고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자리가 정돈되면 여러분의
관심사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과연 정치인이 다르긴 다르다. 김석기는
감탄을 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한 상대의
무게가 전달되면서 가슴은 납덩이로 눌린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왔다.
어쨌든 부딪치고 볼 일이다. 그는 내심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시종일관 뒷전에서
기자회견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기용은 너스레를 떠는 듯하면서도
기자들의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들며
잘도 피해나갔다.
국내의 시국이 혼란스러운 판에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관광용 외유를 즐길 수 있느냐는
독설에 가까운 질문에도 그는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여유있게 빠져나갔다. 집안
사정이 어려울수록 이웃이나 친구의
도움이 절실한게 아니냐며 국내정치의
어려움은 외부에서 그 해결점을 모색할 수
있는 법이라고 오히려 강변했다.
그리고 그들의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늘어놓았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인과의 선린우호체제 유지를
위한 그들의 공도 은근히 과시했다.
아울러 최근 국내에 팽배하고 있는
반미감정과 미국의 통상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완충장치의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먼발치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격론을
지켜보던 김석기는 기자회견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성기용의원 보좌관
안희갑을 한쪽으로 끌어내어 미리 준비해
둔 메모지를 슬쩍 건네주었다.
귀찮은 듯 난색을 표하던 안희갑의
표정은 메모지를 잠깐 훑어보는 순간
대번에 일변했다.
그는 급히 성기용의원의 뒤쪽으로
달려가 성기용의원이 한숨을 돌리는 틈을
타서 재빨리 메모지를 전해주었다.
메모지를 볼 경황이 없는 듯 마무리에
열중하던 성기용은 보좌관의 두 번에 걸친
눈짓에야 비로서 메모지를 들여다 보았다.
안경을 집어들고 메모지를 읽는 순간
그의 표정은 움찔 굳었다. 먼발치에서
김석기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너나 잠시후 안경을 벗고 다시 회견에
임하는 그의 모습에선 조금도 동요의
기색은 없었다. 그는 원래의 포커페이스로
침착하게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보통 능구렁이가 아니로군, 김석기는
다시 한 번 벽에 막히는 듯한 둔중함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후 안희갑보좌관에게 슬쩍
귀엣말로 무언가 지시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총총걸음으로 돌아온
안희갑보좌관이 그를 한쪽으로 잡아
끌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의원님께서 특별히 만나주시겠답니다.
오늘 오후 네 시까지 의원회관
의원님방으로 찾아오십시오. 단, 취재는
30분 이내에 끝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희갑은 총총걸음으로
돌아갔다.
김석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의
의도는 멋들어지게 적중하고 있었다.
대성공이다. 그는 희색이 만면했다.
그들은 취재시간을 30분으로 제한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는 듯 싶었지만
그럴수록 당황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성기용의원의 속을 읽을 수 있어
그는 더욱 유쾌했다.
어쨌든 그의 취재요청을 허락하는 순간
그들의 패배는 불을 보듯 빤히 결정된
일이 아닌가.
김석기는 서둘러 한발 앞서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불같이 화가난 성기용의원은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육중한 체구를 들썩거리며
김종욱비서관을 닥달했다.
귀국을 하다보니 배알이 꼬이고 심사가
뒤틀어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항에서 애송이 같은 기자들의 공세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마치 신경이 치도곤을
당한 듯 파김치가 되어 있는 판에
김석기의 메모는 그의 신경을 곤두 세우게
만들고 말았다.
"존경하는 성기용의원님. 홍해강철의
5천만달러 해외유출내막과 아울러 몇 건의
살인사건에 얽힌 의원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취재를 승낙해 주신다면 다시
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아주신문
김석기 기자 배상"
6 한껏 정중한 어투의 메모였지만 이건
협박이나 다름이 없다. 그가 지금까지
이런 식의 공갈을 당한 적이 없는데, 그
점이 그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홍해강철의 5천만달러 해외유출
사건이라니 그것은 그로서도 금시초문일
뿐아니라 충격적인 소스가 아닐 수
없었다.
또 몇 건의 살인사건이라니, 그의 딸
성귀희의 죽음에 얽힌 문제라면 또
모르겠지만 메모에는 분명 몇 건이
살인사건이라고 지적되어 있지 않는가.
몇 건의 살인사건이라는 문구가 내심
마음에 걸리지 않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는
취재를 허락하고 말았다.
그 기자의 정확한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자신을 협박하는 듯한 용기의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 그는 그 점이
궁금했다.
그런 터에 의원회관으로 돌아오자 또 한
가지 불길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계보사무실인
정치문제 연구소의 여비서 정지숙이 돌연
실종되었다지 않는가.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길래 같은
식구가 행방불명이 됐는데도 여지껏
속수무책이었느냐 이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의원님 안계신 공백을
메우느라 미처 그쪽으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만..."
김비서가 사색이 되어 머리를 조아렸다.
성기용의원의 외유기간 동안 국내 정치의
공백업무를 담당했던 김비서와는 달리
성의원을 수행하여 외유에 따라나섰던
안희갑보좌관은 흥미있는 눈길로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씩씩대며 거칠게 콧김을
뿜어대던 성기용은 제 풀에 지친 듯
이윽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그래, 실종된 지 오늘로 며칠됐어?"
"열흘가량 됐습니다."
"그런데도 여태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아뇨... 의원님 허락도 없는데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어서..."
"그럼 왜 진작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나!"
"저, 전... 한 며칠 지나면 미스 정이
제발로 걸어들어올 것만 같아서 하루이틀
기다리다 보니..."
"이건 사고야! 알겠나?"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병신같은 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불쑥 한마디
내뱉은 성기용은 소파 등받이에 길게 몸을
뉜 채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음... 틀림없이 사고가 난 거야!"
분명한 단정을 내리는 그의 눈빛에선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저도... 나름대로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습니다."
김비서가 변명을 하듯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 하루이틀 동안 전화를 받지
않길래. 제가 사무실로 찾아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문은 잠겨 있는
채였고, 문을 따고 들어가 봤더니 별다른
흔적도 없었습니다. 메모나 근무일지를
살펴봐도 특이한 사항도 없을 뿐 아니라
별다른 약속도 없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하숙집을 찾아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벌써 며칠째 들어오지 않는다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스 정의 깔끔한
성격탓으로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일은 없었다구요."
"그래서?"
"자료수집차 지방출장계획이 있었는데
의원님 안계신 동안 거길 떠난 모양이라고
얼버무려 놓긴 했습니다."
"시골 집에는?"
"거기도 연락해봤습니다. 넌지시
의원님의 안부 전화가 왔었다는 핑계로
갰척쨉거기도 가지않은 눈치였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미스정이 건강히 잘 있는지
묻고 집으로 잘 내려오지도 않는다며 원망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음..."
"그리고 미스 정이 갈 만한 데나 친한
친구들 모두에게 수소문해 봤는데 최근에
미스 정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치안본부 장영국본부장 전화로
연결해."
"네!"
김비서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 재빨리
물러나 전화통에 매달렸다.
사실 이런 일은 함부로 떠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칫 촉각이 예민한
기자가 냄새를 맡는 날이면 매스컴의
"성화에 또 얼마나 시달리며 혹시 스캔들로
비화라도 된다면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에는 장영국경무관이 제격이다.
장영국경무관은 성기용의 봉우이자
무엇이든 터놓을 수 있는 믿음직한
심복이나 진배없었다.
한참만에 비로소 수배가 된 듯 장영국이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하하... 장 본부장, 그 동안
별일없었나?"
그는 장영국경무관을 늘상
치안본부장으로 격상시켜 불러 주었다.
인사치래도 겸하는 말이지만 바로 미래의
치안본부장이란 뜻이기도 했다.
"어이구, 영감님께서 웬일이십니까?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구. 그나저나
외유나가셨다던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 일은 잘 되셨습니까?"
정영국은 그를 늘상 영감이라고 불렀다.
물론 법조계 출신의 선배이자 정치계의
거물인 그에 대한 예우에 맞는 적절한
존칭이 없어 부른 말인데 이제는 입에
배어버렸다.
"하하... 그야 이를 말이오. 누가 하는
일인데, 사실은 내 장본부장한테 은밀한
부탁을 좀 할까 하는데 괜찮겠소?"
"무슨 일입니까?"
"내 사무실에 있던 여자 아이 말이야."
"여자라면? 아, 아, 그 늘씬한 미인
말이군요. 바로 정지숙 씨."
"그래. 미스 정이 실종되었어. 오늘로
벌써 열흘짼데."
"저런, 요즘 유행하는 인신매매범에
냐된 거 아닙니까?"
"글쎄..."
"하하... 틀림없을 겁니다. 나부터도
납치라도 해서 한번 구애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겁니다. 하하..."
"이 사람! 농담말고..."
"알겠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순간 수화기를 든 성기용의 안색에
한가닥 어둠의 빛이 스쳐갔다.
"우리 미스 정을 좀 찾아주게."
"알겠습니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해서라도 소재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하는군!"
"예?"
"전국에 지명수배할 양이면 내가
자네한테 은밀히 부탁할 필요도 없지
않나."
"알겠습니다.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건지."
"조용조용히 소리나지 않도록 좀
해주게. 내 체면을 생각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즉시 그렇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성기용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도 왠지
미덥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장영국은
알겠습니다란 소리를 입에 발린 듯이
뇌까렸지만 그 입바른 소리가 더욱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어쩔 텐가, 지금의
그로선 장영국의 쉬운 대답에라도
기대어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홍해의 유사장 수배해 봐! 지금 즉시!"
그는 괜히 부어오른 심통을 김종욱
비서관에게 퍼부었다.
힐끗 바라본 벽시계의 바늘이 어느새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석기라는
애송이 기자와의 면담시간이 거의 임박해
있지 않은가.
그 놈과의 면담 전에 유사장으로부터
사실 확인을 해야 한다. 5천만달러나 되는
거액을 해외로 유출시켰다니, 그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그
기자의 입을 틀어 막아야 한다.
독단적으로, 그것도 그런 기밀이
새어나갈 정도로 허술하게 처리한
유채택의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그건
2차적인 문제다. 이번의 건수를 해결하고
유재택으로부터 끌어낼 사례금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지금까지의 부아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했다.
"유사장님은 해외출장중이시랍니다."
김비서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듣는 순간
그의 낯빛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시기에 해외여행이라니, 어지간히
한심한 친구로군. 그에 대한 불쾌한
기억들이 떠오르며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어디를 간 건가?"
"지금 유럽에 계신답니다."
"미친 놈! 유럽이 다 뭐야! 제 목에
칼이 꽂히는 줄도 모르고, 이봐."
"네, 의원님."
"홍해에 다시 전화해서 유사장
수배하라구 해. 오늘밤 늦더라도
우리집으로 전화를 해달라고 그래!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네!"
바로 그때였다. 여비서가 인터폰을 통해
김석기의 도착을 알려왔다.
"이로 모셔!:
그는 퉁명스럽게 이르고 소파의
등받이에 길게 몸을 뉘었다.
잠시 후.
여비서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서던 김석기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냉랭한 분위기가 와닿는 듯한 느낌에 흠칫
몸을 추스렸다.
거만스런 포즈로 그를 노려보던
성기용의원이 크게 모션을 취하며 손을
내밀었다.
"바로 당신이오?"
"김석기라고 합니다."
악수를 한 손을 풀지않은 채 성기용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위압적인 자세였다. 김석기는 그렇게
느꼈다.
"자 우선 앉읍시다."
손을 풀어주면서 성기용은 자리를
권했다. 김석기는 조용히 명함 한 장을
내어밀었다.
명함과 김석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성기용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뜻밖의 인물이로군."
"무슨 뜻입니까?"
"나한테 공갈을 칠 정도로 배포가 큰
사람이길래 난 우락부락한 고릴라라도
나타날줄 알았는데 절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탔으니
말이오."
"고릴라가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천만에, 고릴라보다야
샌님상대가 한결 편하지, 안그렇수?"
"어쨌든 죄송합니다. 국정에 바쁘신
분을 이렇게 시간을 뺏어서요.
하지만 성기용의원님을 상대로 공갈을
칠 만큼 배포가 큰 놈은 못됩니다.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하하... 농담이오, 농담."
그때 비서 아가씨가 차를 내어와서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성기용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 이렇게 오셨으니 용건을 먼저
알아봅시다. 말씀 하실까요?"
김석기는 한쪽의 책상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 보좌관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주위를 물리치시는게..."
"하하... 상관 없소이다. 나의 분신과
같은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정
원하시다면."
성기용이 팔을 한번 휘젖자 보좌관들은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자, 이제 됐습니까?"
"고맙니다."
"우선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나와 나누는 대화는 모두
오프더 레코드로 해주실 수 있겠소?"
"그러니까 기사화하지 말라는
뜻이로군요."
"그래요."
"일방적인 주문은 곤란한데요?"
"주문이 아니라 조건이오."
"응하지 않으면 취재를 거부하실
"
"경우에 따라선."
"만약 지킬 수 없을 경우는?"
"약속은 꼭 지켜져야 하오."
"좋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론 부족해요!"
"알겠습니다. 약속하죠."
"반드시!"
"네."
"됐습니다. 얘기를 시작합시다. 그 대신
나도 내가 아는 한도내에선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을 하겠소이다."
취재노트를 들쳐 몇 가지 의문점을 대충
간추린 김석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성귀희여사의 죽음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딸 아이의 죽음을 떠올린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오만 소감을 말하라면
말하겠소. 아버지로서의 가슴아픈 심정을
느꼈지요. 여느 평범한 범부와 다를 바가
있겠소?"
"따님의 돌연한 죽음에 의혹을 가져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그건 사고사요."
"물론 사인은 페니실린 쇼크사였습니다.
하지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그런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미 경찰에서도 종결된
사건이오."
"그렇게 압력을 넣으셨으니까요."
성기용은 와락 김석기를 노려보았다.
끓어오르는 부아를 삭이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성기용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부모의 심정이 되지 않고선, 또 부정한
딸의 죽음을 직접 당해보지 않고선 함부로
말을 해선 안돼요. 가문의 치부를
언제까지나 세상에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이오. 그것이 부끄러우면 부끄러울수록
빨리!"
"알겠습니다. 지난 봄에 제주도에
가셨죠?"
"그래요.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봄인지
어젠지는 모르겠는데 제주도를 갔던
기억은 납니다."
"그때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하셨습니까?"
"그랬지."
"그때 제주도를 방문하신 목적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야 휴양차 내려간 거요. 그때 마침
)정기국회 회기도 끝나고 해서,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요?"
"그때 공교롭게도 그 호텔에서 한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기억나십니까?"
"살인? 아, 아, 그래요. 젊은이 하나가
투신자살했다던데 바로 그 얘기로군.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오?"
"우춘구 씨는 신혼여행 온 신랑으로서
당시 합동공인회계법인 소속의 공인
회계사였습니다. 또 우춘구 씨는
홍해무역의 공인회계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런."
"우춘구 씨는 홍해무역이 5천만달러의
비자금을 해외로 유출시킨 사실을
알아내고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는 그
때문에 살해된 걸로 보여집니다."
"아니, 경찰에선 자살로 결론을 내린 줄
알았는데?"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야 물론, 내가 묵었던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으니까."
"휴양차 가셨다면서 의원님은 다음 날
바로 상경하셨더군요."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휴양을 즐길
기분이 나겠소? 댁이라면? 근데 그 일로
날 의심하고 취재를 하고 있는 거요?"
"천만에요. 단지 의원님께서 그때 그
호텔에 계셨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비이락이겠지만 말입니다. 의심한다면
홍해무역의 비서실장 쪽이겠죠?"
"저런 그 사람도 그 호텔에 묵었소?"
"모르고 계셨습니까?"
"금시초문이오."
성기용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로서도
정말 처음 듣는 말인 듯 생판모를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일류배우를 뺨치는 능구렁이
정치인이다. 김석기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호흡을 조절했다.
성기용 역시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홍해강철그룹의 외화유출 사건이오. 잘
아시겠지만 나도 그 회사와 인연이
닿았다면 닿은 사람이었으니까. 내 말뜻
아시겠소?"
"네."
"그래서 묻는건데 그 사안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는 가지고 있소?"
"아뇨."
"물증도 없이 그런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있는거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우춘구 씨가
남긴 메모는 있습니다."
"그 메모를 한 번 봅시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경찰에 있습니다."
"저런."
순간 성기용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뜻밖의 사태에 그로서도
당황함을 감출 길이 없는 듯보였다.
김석기는 노회한 정치인의 허둥대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럼, 경찰이 벌써 수사를
착수했겠군."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소, 내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그 외화유출건 말인데 당분간만
덮어주시오. 이건 일개 기업의 흥망이
걸린 문제요. 확실한 증거가 확보되기
전에는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
"진상이 밝혀질 때가지만 보류를
해달라는 거요. 내 부탁이 무리한 거요?"
"알겠습니다."
그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사위인
유재택사장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다.
"어허, 그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 그런
무리한 짓을 다하다니..."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기용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오.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경우에 닿기나 하는
일이오? 나름대로 나도 진상을 파악해
보겠소. 그러니 그때까지만 시간을
주시오. 젊은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젊은이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의원님만 믿고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김석기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기용의원을 믿는 마음은 애초부터
눈꼽만큼도 없었다.
지금부터 증거인멸을 위해 몸부림을
치실 테지.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수렁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할는지도
모른다.
김석기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성기용은 처음에 소파에서 거만스럽게
그를 맞이했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의원회관 현관까지 따라나와 배웅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김석기는 씁쓰레한 미소를 흘리며
의원회관을 빠져나왔다.
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성기용은 급히
보좌관들을 소집하고 긴급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그들과 머리를 맞대었다.
그 날도 오후 세 시쯤이나 되었을까?
피곤한 탐문수사를 마친 후였다. 도덕록
형사와 함께 여의도의 일식전문점
주문진에서 알탕 한 그릇씩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나서던 손삼수는 눈길을
끄는 광경에 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음식점 벽의
한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수족관이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거대한 수족관 속의
바닷물을 바꾸어주는 물갈이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은 수족관에서 밖으로
뻗어나간 대형호스를 쫓았고 그 끝에는
대형 물탱크를 등에 실은 복사 한 대가 서
있었다. 얼핏보면 유조차로 오인할 만큼
유조차와 흡사하게 닮은 꼴의 차였다.
아마도 음식점의 전용수송차량인 듯
차의 옆구리에는 주문진이라는 상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어떤
영감에 손삼수는 이마를 쳤다. 그리고
급히 모터를 작동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는
운전기사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이 물은 어디서 실어온
거죠?"
"보고서도 모르겠소?"
"이게 진짜 바닷물이오?"
"어허, 웃기는 양반 다 보겠군,
바다고기가 민물에서 헤엄치는 것 봤소?
이 물은 말입니다. 동해바다 하고도
주문지에서 공수해오는 진짜
바닷물이외다. 어디 지금 막 실어온
싱싱한 바다짠물 맛을 한 번 보시겠소."
그렇다! 바로 이거다. 손삼수는 왜 진작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하고
자신의 우둔한 머리를 새삼스레 손등으로
두드렸다.
} 유용치의 십이지장에서 속초바닷가의
플랑크톤이 검출된 후 손삼수는 심각한
딜레머에 직면한 뒤, 지금까지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용치가 속초 앞바다에서 익사했거나
익사당한 후 인천 해안에 퍼졌다는 사실은
과학수사가 입증해 낸 쾌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은 반증할 논리적 근거는 전혀
알아내지 못한채 과학수사는 오히려 그를
혼돈의 수수께끼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유용치의 사체부검결과 사망측정시각은
유용치가 김석기에게 인천으로 모종의
의문을 캐러 간다는 전화를 넣은 직후로
밝혀졌다. 부검의 오차를 여섯 시간
가까이 잡아준다고 해도 그 시간에 그가
속초로 달려가 익사했으며, 또 누군가에
의해 인천 앞바다에 버려졌다는건 터무니
없는 논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상주박사는 그나마도 펄쩍
뛰며 사망측정의 오차를 길게 잡아봐야 두
시간 이상은 있을 수 없다며 결코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것은 과학이 입증해낸
쾌거였다.
넌센스이며 수수께끼가 아닌가?
유용치가 4차원의 세계에서 살해되지
않았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삼면을 둘러싼 바다의 수심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었으나 대체로 서해는
해안에서 수킬로를 나가봐야 수심이
100미터를 넘지 못하는 개펄로 이루어진
바다이지만 동해바다는 해안에서
1,2킬로만 나가도 500m 수심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설에만 의존한다 하더라도
유용치의 위와 십이지장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은 결단코 인천 해안에서
서식하는 플랑크톤일 수 없다는 역설적
논리가 훌륭하게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손삼수의 골머리를 썩이던
의문은 주문진의 수족관을 보는 순간
깨끗이 씻겨지고 있었다.
유용치가 속초 앞바다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속초 앞바다에서 길러온
동해바다의 물을 사용하는 수족관에서
살해된 후 인천해안에 유기되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손삼수는 즉각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서울과 경기 수원의 대형일식집에 대한
탐문수사를 벌여 나갔다.


14. 왕궁의 참변
새벽 한 시경.
고급사교클럽 왕궁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늘씬한 미녀 대 여섯 명이 떼를 지어
몰려나왔다.
그녀들은 언제나처럼 큰 길 모퉁이의
심야 영업 스낵바인 OB호프에서 치킨과
생맥주를 시켜놓고 뜯고 마시며
재잘거렸다.
그녀들에겐 오늘처럼 손님이 뜸해
특별히 바쁘지 않고 개인적인 약속이나
스케줄이 없는 날의 퇴근길에 늘상
벌어지는 일상적인 회식이었다.
새벽 한두시쯤이면 한창 배가 출출한
시각이라 허기진 배를 채울겸 해장술로
들이키는 한 잔의 생맥주맛은 상큼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오늘 하룻동안
벌어졌던 각종 우스갯거리들로 재잘거리며
짓궂은 손님들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흉을
보기도 하며 입방아들을 찧었다.
이렇게 일과를 결산하고 나면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어느 정도 가시기도 하고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감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무지막지하게 구겨졌던
자존심도 어느 정도 펼 수 있는 듯 싶어
그녀들은 이런 자리를 즐겼다.
오늘도 여느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설국희는 동료들과의 재담이
즐거우면서도 왠지 조금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신경이 쓰이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창가의 구석자리에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두 사람의 사내 중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맞은 편 사내의
시선 때문이었다.
왠지 사내의 시선에는 끈끈한 무엇이
붙어 있는 듯하여 번번이 그녀의 신경에
거슬렀다.
혹시나 안면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새삼 살펴보았지만 틀림없이 낯선
얼굴이었다.
누굴까? 분명 초면이었지만 그의 시선에
담긴 눈빛은 일상적인 그것은 아닌
듯했다.
설국희는 짐짓 외면을 했다. 어차피
자존심과 알몸마저 던지고 사는 세상에
뭇사내들이 끈끈한 시선으로 본다고 뭐
대수랴. 어차피 쳐다본다고 닳을 몸도
아닌 터에 실컷 보라지 뭐. 설국희는
1대수롭지 않게 묵살해버리기로 마음을
먹자 기분이 한결 개운해지는 듯했고
동료들과의 화제에 빠져들면서 사내의
시선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30여 분 후.
설국희은 동료들과 함께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일 만큼 강덩이를 부풀려서
OB호프를 빠져 나왔다.
그녀가 술집을 빠져나올 때 언제
사라졌는지 사내들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끈끈한 시선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새벽 2시경쯤 그녀들은 두 대의 택시에
나누어타고 귀가를 서둘렀다.
설국희는 집 방향이 비슷한 은혜와
합승을 하고 양재동 못미처 포일동
어귀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신흥주택단지라 벌판 가운데 군데군데
단독주택들이 밀집해 있었고 국희의
셋방은 비교적 단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밤이 이슥한 시각이라 이따금씩 서 있는
가로등만이 졸고 있을 뿐 사위는 인적
하나없이 고요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국희는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자신의 하이힐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그림자하나 없는 이런 밤거리가
그녀는 언제나 무서웠다. 더구나 군데군데
시커멓게 벌리고 있는 벌판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나마 요즘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 비교적 나은 편이다. 방세가
싼맛에 처음 세들었던 일 년전만 해도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나 진배 없었다.
하루 빨리 번화하고 살기편한 영동
중심부의 아파트로 옮기겠다고 결심한 지
오래였으나 언제나 마음뿐,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다.
우선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나태해진 생활습관에 젖어
있다가 번거롭게 이사를 한다는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그래도 결국 이사는 해야겠다' 바로
그때였다. 상념에 젖은 채 무심코 골목의
모퉁이를 돌던 국희는 별안간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물체에 화들짝 놀라며 간이 덜컹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상대는 두 사람의 사내였다.
"누, 누구세요..."
너무 놀란 그녀는 간이 오그라드는 듯한
충격과 함께 숨이 턱턱 막힐 뿐 아니라
말소리가 입 밖으로 제대로 새어나오지
않는 듯했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
순간 그녀는 가로등 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사내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 놈들이다! 국희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들은 OB호프에서 그녀에게
끈끈한 시선을 던진 바로 그
사내들이었다.
"놔요! 놔! 사람살려요!"
그녀는 별안간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사내들을 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정수리에 세찬 충격을 느끼며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녀의 몸 위로 사내들의
발길질이 무수히 가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두 사내의 양손에 잡힌
채 개 끌려가듯 질질 끌려갔다.
그들은 벌판의 암흑 같은 어둠 속으로
그녀를 끌고갈 요량인 듯했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발악을
해서라도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도무지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요란한 클랙슨 소리와 함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사내들의 당황한 몇 마디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몸이 길바닥에 세차게
나동그라지면서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두어
시간이 지나서였다.
얼굴을 닦아내는 물수건의 따뜻한
감촉에 그녀는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의 내
몸뚱이는 산산조각으로 짓이겨져 있어야
할 텐데 온몸에서 퍼져오는 감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폭신하고 안온한 느낌에
살포시 눈을 뜬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 또래의 여자가 희고 가지런한
이빨을 내보이며 활짝 웃고 있지 않는가?
"어머, 정신이 드세요."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에요?"
방 안을 둘러보니 어느 가정집의 안방인
듯했다. 세련되고 사치스럽게 장식된
실내분위기를 언뜻 살펴본 순간 안도감이
밀려들면서 맥이 탁 풀어져 그녀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안심하세요. 그 못된 놈들은
쫓아버렸으니까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사처럼
예쁘고 착한 여인이라고 국희는 언뜻
생각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누워 있어요."
자리에 앉은 채로 온몸을 훑어보니
상처를 크게 입지는 않은 듯했다.
"언니가 절 구해주셨군요."
"내가 뭐 한 게 있나요. 클랙슨을 마구
눌러대니까 그 놈들이 놀라서 제풀에
달아나 버렸지..."
"고마워요 정말..."
그녀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목구멍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별소릴 다하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당연히 도와야지."
그녀는 새삼스럽게 아늑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미처 생각을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어요?"
"다행히 크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었나
봐. 두어 시간만에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어머, 두 시간이나요?"
문득 생각난 듯 그녀는 서둘러 일어날
채비를 차렸다.
"어머, 안돼요. 그런 몸으로 어딜
간다구?"
"집으로 가야 해요."
"아서요.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쉬어요."
"하지만..."
"폐 될것 하나도 없어. 이 집엔 나혼자
덜렁 살고 있으니까 적적하던 참인데 마침
잘 됐지, 뭐."
"정말... 괜찮을까요?"
"염려마, 마음 푹 놔요.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는데 또 봉변이나 당하면
어쩌려구. 아무래도 내가 두어 살은
위같으니까 언니집에 온 셈치고 마음놓고
쉬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어려운 세상, 서로 도우며
사는 거지."
"여기가 어디에요?"
"방배동 삼덕맨션이야."
"네에?"
국희는 새삼스럽게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삼덕맨션이라면 장안에서도
이름이 난 고급주택으로 손꼽힌다.
이런 호화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는
그녀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던 것이다.
"전 설국희라고 해요. 언니는?"
"난 금혜수라고 해."
"어머나, 언니 얼굴처럼 이름도 참
예쁘다."
"국희란 이름이 더 예쁜걸?"
금혜수는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으며
국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금혜수란 제3의 여인으로 분장한
윤정님이었다.
정님은 목하 품 속으로 뛰어든 제물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우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예쁘기만 하면 뭘해...
살아가는 낙이 없는걸."
"어머, 언니가 왜요?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국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정님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차피 국희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솔직히 얘기하고 싶어. 국희는
현지처라는 얘기 들어봤어?"
"그럼... 언니가?"
"그래, 난 돈 많은 일본의 실업가와
계약결혼을 했어. 한 달에 한 번이나
아니면 몇 달에 한 번씩 불쑥 나타나는
일본인 남편을 목놓고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지."
"어머나, 정말 부럽다."
국희는 손뼉을 치며 감탄을 했다.
"얘는?"
"정말이야 언니, 나도 이런 생활 좀
해봤음 좋겠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독수공방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그렇다구 히스오 씨와의 사랑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도 아니구. 어디까지나 시한부
인생이나 진배가 없어. 아직은 내가
젊음을 잃지 않고 있으니까 견딜수 있지만
언젠가는 버림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하루빨리 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그리고 여길 박차고 뛰어 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정님은 다시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렇다고 나가봐야 당장 뾰족한 수도
없으니,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따금씩 옛날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
"예전에 뭘 했는데?"
"무희였어. 성인 디스코텍에서. 하스오
씨를 만난 것도 거기서였어."
"나체춤?"
"응."
"호호..."
별안간 국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믿어지지 않아. 언니가 나체춤을
췄다니."
"얘는 그게 어때서. 난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그렇잖아도 요즘은 무료해서 견딜수가
없길래 다시 그 길로 나가볼까 하고
자리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야."
순간 국희의 눈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번졌다.
"언니, 그럼 나하고 같이 일해볼 생각
없수?"
"국희하고 함께? 어떤 일인데? 여건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없지.
그렇잖아도 혼자서 적적하던 참인데
국희가 여기서 함께 살아도 좋고."
"정말이야 언니?"
"그럼."
구미가 바싹 동한 듯 국희는 열을 내어
왕궁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님은 난생 처음 듣는 고급사교클럽에
구미가 동하는 눈치를 보이면서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호감을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국희는
더욱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정님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왕궁으로 잠입하기 위한 루트로 설국희를
선택했던 자신의 계획이 멋들어지게
별그녀는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녀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말마의 신음을 토하며 백합은 몸을
일으켜 옆으로 드러누웠다.
침대 옆의 붉은 조명에 반사된 그의
몸은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오키노가 손을 뻗으며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이 달링, 정말 멋져요. 당신은
스트롱맨이야."
"당신도."
그는 사랑스런 오키노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오키노는 정말 굉장한 여자였다. 그녀는
정염의 화신과도 같이 한 번 불이 붙으면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여자였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녀의 몸 속에선
새로운 정염이 활화산이 터지듯
솟아나왔다.
방금도 그녀와의 열정적인 정사로
녹초가 된 그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백합 역시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의 보조개에 담긴 무한한 매력에 온통
빠져서 허우적댄다는 표현이 옳을는지도
몰랐다.
오키노를 서울로 끌어올린 그는 대뜸
저택을 한 채 구입하여 오키노를 들어
앉히고 그의 오랜 호텔생활도 청산하고
말았다.
누구에게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것은 가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그만큼 오키노는 투자할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오키노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고
몸을 일으킨 그는 욕실에 들어가 냉수를
한바탕 뒤집어 썼다. 온몸에 끈적거리는
땀을 비눗물로 가볍게 씻어내고 샤워를
하자 온몸이 개운해지면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온 그는 등나무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자 한결 머리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Q를 제거해야 한다.
그는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을 머릿속에
졺맘
정지숙을 문초하여 알아낸 전화번호의
소재지는 뜻밖에도 성기용의원의
저택이었다. 전화가입주 역시
성기용이었으며 저택에 설치된 세 대의
전화중 한 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Q는 역시 성기용의원이었단
말인가?
백합은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그것은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가설이다.
정지숙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분명히 말을 했다. Q는
외유중이라고.
그는 어젯밤 TV저녁뉴스에서 본
성기용의원의 귀국 기자회견 장면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성기용이 Q였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호락호락한
일이 결코 아니다. 성기용과 같은 거물을
제거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이지만 또 그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다.
나라 안이 발칵 뒤집힐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그의 아성이 일거에 무너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그래서 조직의 본부에서도 Q를
쉽사리 제거할 수 없어 나를 끌어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마에 배어나오는 진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이제 어쩐다? 지금와서 발을 뺄 수도
없거니와 조직의 명령은 더더욱 어길 수
없는 일이다.
사면초가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낭패스러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별수 없군. 일단 천사와의 접선 날짜가
며칠 후로 다가와 있으니 그의 태도를
지켜본 후 모든걸 결정하는 수 밖에
없겠지.
그가 마음을 정하고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따르르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왕궁
지배인 황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전화선을
타고 울려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왕궁이 쑥밭이
됐습니다. 정체불명의 괴한 수십 명이
몰려와서 업소를 마구 때려부숩니다.
도와주십시오!"
"뭐야?"
백합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대소동이 벌어진 것은 윤정님이
왕궁으로 잠입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국희의 소개로 마담 송을 만나 면접을
마친 후 왕궁에 첫 출근을 한 날, 정님은
어지간히 놀라고 말았다.
회원제 고급사교클럽이라는 국희의 언질
때문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밖에서 볼 때보다 더욱 으리으리한
내부시설에 우선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왕궁의 변태적인 영업 방법이었다.
출근을 하는 순간부터 발가벗어야
한다는 사규도 그랬지만 손님에게 지명이
될 때까지 풀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규정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근 첫날과 그 다음 날까지 그녀는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마치 미인대회에 출전한
여자처럼 아름다움과 매력을 뽐내어
왕궁을 찾는 남자들의 눈요기감이 되고
빨리 선택되지 못했을 때의 패배감은
무엇보다 큰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청순한 매력이
어필되었던 듯 그녀는 곧잘 처음부터
선택되어 손님의 방으로 호출되어 가곤
했다.
그녀의 높은 인기에 흡족한 듯 송마담은
그녀를 끔찍이 생각해주는 척했다.
그녀의 학력과 교양이 인정되어
카운터의 경리자리로 옮길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졌으나 그녀는 과감히
뿌리치고 말았다. 불량배의 폭행사건 다음
날부터 그녀의 숙소로 옮겨온 국희와의
의리 때문이기도 했으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좀더 자유롭고 남들의
눈을 끌지 않는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그녀는 옷벗는
일에도 이력이 붙게 되었고 뭇남자들
앞에서도 자신있게 치부를 보일 수 있을
만큼 용기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복수를 수행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대가이다.
어차피 목욕탕에서 옷 벗는 걸로
치부하면 약간의 수모는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까짓 옷을 걸치고 걸치지 않는
게 무어그리 대수이겠는가.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면서 대담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치를 수 있는 용기도 차츰 생겨났다.
그리고 그녀는 동료 호스티스들과의
사교에 정성을 들였고 인기를 얻는 일에도
애를 쓴 보람이 있어 일주일 후에는 거의
모든 아가 씨들이 그녀를 따르고
좋아하게끔 되었다.
그러나 지난날 홍해강철 그룹의
화장실에서 목격했던 문제의 사나이,
그녀가 꿈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천추의
한을 남겨준 괴한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놈은 이곳의 단골손님일까? 아니면
왕궁의 거래처 사람중 하나일까?
어느쪽인지 종잡을 수는 없었으나
_그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채 끈기있게 기다렸다.
그곳에 자주 출입하는 단골손님
중에서도 혹시나 특별한 인물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관심을 기울였다.
단골 중에서는 남철희박사와
홍성국박사가 특히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남철희박사는 무언지 알 수
없는 우수가 얼굴에 늘 끼어 있어 그녀의
호기심을 끌고는 했다.
2-3일에 한 번씩 들리는 남철희박사가
홍성국박사를 대동하고 나타나면 송마담의
앞장서서 수선을 떨며 특별대접을 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는 언제나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마셔대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해대곤 했다.
그럴 때면 당황한 홍박사에 의해
제지되거나 억지로 끌려나가기 일쑤였는데
그녀가 남박사를 주목하게 된 것은 며칠
전에 있었던 횡설수설 때문이었다.
그날도 폭주 끝에 과음한 남박사는
아니나 다를까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성귀희라는 여자의 이름을
뇌까리더니 성귀희의 죽음은 자신과
무관하다. 나는 죄가 없다는 투로 몇
번인가 중얼거리며 악을 쓰고 버둥대다가
홍박사에 의해 끌려 나갔다.
성귀희라는 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기용의원의 무남독녀 외딸,
홍해강철그룹 유재택사장의 부인, 그녀의
돌연한 죽음에 남철희박사가 연루되어
있다니.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우연히
입수한 정보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남철희박사는 왕궁에 들르는
날이면 꼭 그녀를 점지하곤 했다.
어쩌면 그녀의 처지에서 느껴지는
동병상련의 분위기를 감 잡아서일까?
그녀는 그렇게 혼자 생각하며 속으로
웃곤했다.
그리고 다음날 왕궁에 들른 남박사는
누군가로부터 충고를 받은 듯 어젯밤의
술주정을 사과했고 그 후론 얌전하게 술만
마시고 돌아가곤 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렇게 열흘째가 되던 날.
왕궁은 정체모를 괴한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 당하고 말았다.
밤이 이슥한 시각에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 20여 명은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낫,
도끼, 철봉 등 무시무시한 흉기들로
왕궁의 내부시설을 닥치는대로 때려
부쉈다.
그들은 외부와의 연락선인 전화선을
끊고 정문을 굳게 지키며 왕궁을 완전
고립시킨 채 무려 삼십여 분에 걸쳐
난행을 거듭하였다.
왕궁은 대번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다행히 그들은 반항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끔찍한 흉기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이리뛰고
저리뛰는 벌거숭이 여자들에게 그들은
관심도 두지 않는 듯했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덩치 큰 웨이터가
그들에게 덤벼들다가 낫에 찔려 쓰러진 후
그들에게 대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동안 공포분이기를 조성하며 설치던
그들은 왕궁의 사람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왕궁의 지배인, 마담 등 경영자측
직원들을 분리하고 웨이터와 호스티스를
솎아낸 후, 손님들을 모아 신분을 확인한
후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중의 리더인 듯한 자가
종업원과 직원들을 상대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소재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미모의 여인이었다.
차례가 되어 사진을 들여다 본 정님은
겁에 질려 숨도 쉬지 못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로선 생판 모르는 여자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매한가지였다.
그 여자의 사진이 바로 정지숙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놈들이 도끼를 휘두르며 겁을 주었지만
정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의 결과에 실망한 듯 리더격인
사내가 마지막 엄포를 놓은 후 철수를
명령하고 그들은 썰물이 빠지듯 사리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동안 왕궁의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백합과 경호원인 듯한 일당의 청년들이
들이닥친 것은 괴한들이 철수한 지 20여
분이나 지나서였다.
백합은 노발대발하여 청년들을
윽박질렀다.
알고 보니 왕궁의 경비를 책임져야 할
주먹들이 그들 요원 중의 한 사람집에서
벌어진 집들이에 참석하여 한꺼번에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정과장이란 집들이의 주인공은 백합의
주먹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정님은 뒤늦게 나타난 청년들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온몸에 치솟는
전율을 억제하느라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문제의
괴한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국희의 귀에 대고 귀엣말로 속삭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저사람들은
누구니?"
그녀는 네 명의 사나이들을 가리켰다.
국희가 대뜸 말을 받아 속삭였다.
"사장님과 직속 경호원들이에요. 여기
직원들이에요."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 속에서 번져 나오는 환희를
억누르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백합의 원한에 가득찬 원성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 들어 왔다.
"두고보자! 이 새끼들! 이 빚은
틀림없이 갚아주고 말 테니까!"
서울과 경기일원 일식전문점의 수족관에
대한 정밀 분석에 나선 손삼수는 뜻밖의
새로운 사실들을 속속 접하게 되었다.
수사팀은 대형 일식집만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를 벌였으나 우선 일식집의
엄청난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체인화되어 전국으로 번져 나가는 몇몇
대형업채의 규모에 그들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치찌개니 된장찌개니 하는 한국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그들로선 변질된
음식문화의 엄청난 규모에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업소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그들이
분석한 수족관의 내용도 제각각이었다.
바닷물만 해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수족관 속의 물은 막연히
바닷물이겠거니 하고 그들의 피상적인
관념은 이번의 수사로 완전히 바로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닷물의 내용도 정말 다양했다. 서울의
일식집에서 사용되는 바닷물에는 서해의
아산만이나 삽교천에서 공수해 오는
C바닷물이 있는가 하면 서울근교인 반월의
사리포구에서 바닷물을 사서 쓰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주문진이나 동해바다처럼
직접 동해 바다에서 물을 날라오는
대형업체가 있는가 하면 전문적인 바닷물
장수로부터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일식집도
부지기수였다.
업계의 형편을 대충 파악한 손삼수는
이번엔 수사범위를 축소하여 바닷물
공급회사중에서 속초의 바닷물만을
전문적으로 공급하는 업자로 한정하여
범위를 압축해 나갔다.
그리고 속초에서 바닷물을 끌어오는
업자가 두사람 뿐임이 확인되자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거래음식점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나 광범위하여 수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탐문작업이
시일이 흘러가면서 대상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손삼수는 수사의 기준을 몇 가지 설정해
놓고 끈질기게 탐문을 거듭한 결과 일주일
후에 조사범위가 한층 좁아들어 어깨가
조금씩 가벼워짐을 느낄 정도였다.
철저하게 유용치나 우춘구 혹은 윤정님
그리고 합동회계법인과의 연결부분이
있거나 선이 닿을 수 있는 업소를
찾아나섰다.
손삼수는 왕궁이라는 유흥업소에
착안하기 시작한 것은 체크리스트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손삼수는 왕궁탐색을 결정했을
때는 왕궁이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거의 쑥밭이 되어버린
직후였다.
손삼수는 또다시 허탈감에 접어들고
말았다. 자신이 한발 늦은 왕궁은 쑥밭이
되어 내부수리중이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채 휴업상태에 있었고 경영주 및
주요간부들은 모두 잠적해 버린 후라
수사는 한 발짝도 전진해 보지 못한 채 또
다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15.음모의 종말
왕궁의 폭력배 난동사건은 다음 날 신문
사회면을 온통 장식하며 센세이션널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활개치는 조직 표력배의 집단 난투극."
사회면 톱을 차지한 머릿기사에 이어
식칼, 낫, 도끼. 철봉 등으로 무장하고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한 왕궁피습사건은
모든 매스컴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말았다.
사건현장의 참혹하고 끔찍한 상황이
생생하게 보도되면서 나라 안은 온통
들끊었다.
잇따라 유흥가에 도사리고 있는 조직
폭력배들의 실상이 매스컴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속속 보도되면서 경찰의
무능을 질타하고 치안부재의 상황을
우려하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인을 더욱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그러니까 왕궁 테러가 빚어진 지 불과
이틀 후의 오전이었다.
출근길의 러시아워가 막 끝난 열시경
성기용의원의 그랜저 승용차는 88올림픽
도로를 빠져나와 여의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88도로의 여의도 북측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 승용차가 국회의사당을 향해
좌회전 깜박이등을 넣고 정차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둔탁한 굉음과 함께 승용차가
거칠게 요동을 쳤다. 백미러를 들여다보던
운전기사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떤 새끼들이 감히!"
어처구니 없게도 뒤따라오던 르망이
그랜저의 뒤꽁무니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운전기사가 짜증을 부리며 운전석에서
내려서자 뒤차에서 내린 청년 세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야! 임마! 눈깔 똑바로 뜨고 운전
제대로 해, 알겠어?"
운전기사가 눈을 부라리며 성깔을
퍼부으려 할 순간이었다. 앞장 선 청년의
강력한 라이트 어퍼컷에 의해 운전기사는
말은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성기용의원이 막
차문을 밀고 나오려 할 때였다.
운전석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강렬한
악취를 풍기는 병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염산이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가
얼굴을 숙이며 피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는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시트
바닥을 딩굴었다.
이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청년들은 재빨리 르망에 올라타고 차를
급발진시켜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운전기사가 급히
차를 돌려 성모병원 응급실로
성기용의원을 모신 후 경찰과
국회경비대에 신고를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서울 일원에 즉각 비상경게령이
내려졌다.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범인검거를 위한
총력태세로 나섰다.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폈으나 문제의 사고차량인 르망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회의에 참석했다가 사고 소식을
접한 손삼수반장은 즉각 현장으로
달려왔고 성기용의원 테러사건 임시
수사본부인 국회 경비대 사무실에는 시경
강력계장을 비롯 수사과장은 물론,
시경국장 치안본부장 등의 거물들이 속속
도착하여 북적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성기용의원이라면 여당의
현역 정치인이자 차기 대권을 노리는 거물
중의 거물정치인 아닌가. 그런 인물이
백주에 테러를 당하다니, 그들의 낯빛은
무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왕궁 테러에 이은 정치인 피습이라니,
범행의 치밀성과 끔찍하면서도 대담한
소행은 그들 모두의 간을 오그라들게
했다.
이제부터 빗발처럼 쏟아질 치안부재란
비난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그들은
그 궁리를 하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러다가 30여 분 후, 성모병원으로부터
성기용의원이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는
비보가 날아들면서 그들은 아예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 끝장이다. 그들은 그렇게 느꼈으며
그렇게 생각을 정하자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이 드는 듯했다.
다시 30분 후.
이번엔 도주차량을 발견했다는 전갈이
날아왔다.
이 때다 싶어 손삼수는 수사본부를
빠져나왔다. 무엇보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이런 끔찍한
범죄를 대담하게 저지를 수 있는 놈들이.
문제의 차량이 발견되었다는 신길동
언덕배기의 공터를 향해 달리는 패트롤카
속에서 손삼수는 내내 그 생각에만
골몰하였다.
조금 전에 수사본부에서 치안본부장
주재로 진행된 수사회의의 초점도 바로 그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첫번째로 떠오른 해답은 원한
관계였으나 그것은 성기용의원의 사생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처지로서 섣불리
거론하기 어려운 문제라 일단 뒤로
미루어졌다.
둘째는 권력투쟁을 들었으나 이 또한
방법이 졸렬함과 함께 가능성의 희박으로
제외되었다.
다음으로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북한측의 요인암살 계획이 거론되었으나
대상이 하필 성기용의원일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빠졌고, 역시 강력하게 대두된
해답은 좌경폭력 세력의 조직적 테러일
가능성이었다.
모두들 그 점에서는 공감하는 눈치를
보였다. 아니 그쪽으로 수사를 몰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만약 여론을 그쪽으로만 집중시킬 수
있다면 치안부재상황의 무능한 경찰이란
비난을 면할 수 있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그들의 가슴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곧 재야 세력이나 좌경 세력들이
된서리를 맞겠군, 손삼수는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전에 목격한 경찰 수뇌부의
기세등등한 각오로 보아서는 된서리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벌일 수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현장에 도착한 손삼수는 우선 문제의
차량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헤드라이트를 비롯한 납작해진 앞쪽의
몰골로 보아 도주차량이 틀림없는 듯했다.
더욱이 차량에서 발견되었다는 쪽지가
그를 아연실색케 했다.
"지문채취 열심히 해보슈."
마치 발가락으로 쓴 듯 서투르게 휘갈겨
쓴 쪽지를 보는 순간 손삼수는 터져
나오는 울화를 억제할 수 없어 애꿎은
타이어에 발길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지문채취를 하느라 승용차
내부의 여기저기에 백분가루를 뿌리는
도형사를 말렸다. 도형사는 거의 끝났다며
작업을 감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내부에서는 지문은 물론 그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형사는 이번엔 청소기를 들이대고
차내에 떨어진 먼지 따위를 빨아들였다.
혹시나 범인의 모발이 떨어져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삼수는 이윽고
등을 돌리고 말았다.
두고 봐라 이놈! 경찰을 조롱하다니, 네
놈을 기어코 잡아내고 말 테니.
패트롤카로 돌아온 그는 무전으로 시경
상황실을 호출하고 차량조회를 했다.
차주가 과연 누구일까 해서였다. 정확하게
2분 후, 무전을 통해 답신이 들어왔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문제의 차는 도난당한
차였던 것이다.
그 이틀 동안 김석기 역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석기를 비롯하여 아주신문사
사회부기자 30여 명이 총동원되다시피하여
치안부재의 현실과 폭력조직의 실상을
파헤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김석기는 취재팀을 총지휘하는
가운데서도 윤정님의 근황을 알아내고자
무척 애를 썼으나 그녀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이번엔 성기용의원에 대한
염산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더이상
윤정님에게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성기용의원 테러사건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여타 다른 매스컴에서는 성기용의원의
피습에 관하여 경찰의 발표문을 인용한
좌경폭력이나 북한측의 요인암살계획의
가능성을 흘리고 있었으나 그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그는 취재반을 4개반으로 나누었다.
제1반에는 홍해강철그룹의 동정을
비밀리에 탐색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영문도 모른 채 사건의 외곽에 배치된
취재 1반 기자들은 연달아 불평을
터뜨렸으나 특종이 터질지 모른다는
김석기의 암시만 믿고 취재에 나섰다.
그리고 제2반은 성기용의원 주변에
매달리게 했다.
성기용의원 보좌관을 비롯한 가족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토록 했다.
다음 제3반은 왕궁에 대해 취재를
강화토록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왕궁
습격에 연이어 터진 성기용의원
테러사건은 연관된 사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우려 때문이었다.
왕궁을 취재하면서 그는 한가닥 깊은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왕궁은 상류층 인사들만이
드나드는 고급사교클럽으로서 회원제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회원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저명인사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론 성기용의원 역시 왕궁의
회원이었다. 바로 그 점이 그로 하여금
왕궁에 집착토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4반은 비상대기조로 편성하여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는 지원체제를
구축하여 24시간 대기토록 했다.
김석기가 홍해강철그룹 주변에 포진한
취재 1반을 둘러보고 왕궁이 있는
테헤란로로 가기 위해 제3한강교를 차로
달리고 있을 때였다.
허리춤에서 삐삐가 요란하게 울었다.
급히 송신기를 살펴보니 비상대기조에
속한 석기자의 호출번호가 디지털로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무서운 속도로 한남대교를 가로지른
그는 급히 우측의 리버사이드 호텔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넣고 로비의
공중전화부스로 뛰어들었다.
"아, 석기자? 무슨 일이야?"
"윤정님 씨라는데요, 급히 전할 말이
있으시답니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십니까? 5분 후 다시
전화를 넣기로 했는데요?"
"그럼 이쪽으로 전화를 달라구 부탁해.
내가 리버사이드호텔 커피숍에서 전화를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호텔 전화번호를 일러주고
커피숍으로 들어온 그는 입구 쪽의
카운터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무슨 일일까?
그녀가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면 필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찾지 못해 안달하던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설레는 듯했다.
정확하게 5분 후, 카운터의 전화벨이
울렸다.
김석기는 급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혹시 김석기라는 사람을 찾으면 좀
바꿔주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카운터 아가씨가 이내
그에게 전화기를 돌려 주었다. 상대는
역시 윤정님이었다.
"지금 어디 있는 거요? 정님 씨?"
"그건 아실 필요없어요."
"제발 사람 애 좀 작작 태우고
말해주시오. 내 곧 달려가겠소."
이쪽의 간절한 마음이 전달된 듯 정님은
말을 끊고 가늘게 한숨을 몰아쉬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생각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놈들은 벌써 제 손아귀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이것 봐요, 정님 씨!"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정님의 말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잘랐다.
"더 급한 일이 있어요.
한국과학연구소의 남철희박사를
살펴보세요. 그 사람이 바로 성귀희여사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에요."
"뭐, 뭐요? 그게 정말이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백합은 컴퓨터의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전사사서함을 통하여 천사의
부호와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깜박이기 시작했다.
백합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천사와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사다."
"여기는 불새. 임무를 완수했음."
"임무를 완수하다니? 틀림없는가?"
"그렇습니다. Q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병신같은 놈. Q는 제거되지 않았다."
순간 백합은 깜짝 놀라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랩탑
컴퓨터의 버튼을 두들겨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Q는
분명 제거했습니다."
"어리석은 놈. 너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성기용은 Q가 아니다."
"그럴 리가..."
"네가 한 짓은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뽑아버린 것과 같다. 넌 큰 실수를
저질렀어. 조직의 상부에선 크게 노하고
있다. 너는 이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백합의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샛노랗게
변해갔다. 그는 급히 키보드를 눌러댔다.
"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틀림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제발..."
그는 공포에 짓눌린 듯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는 거의 초죽음이 된 얼굴로
애원을 했다.
"이번엔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니터의 화상은 냉정하게
잘랐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지난번의
.지시는 철회한다. 자결하라! 그것만이
네가 비극적 종말을 면할 수 있는 길이다.
이상 천사로부터."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백합은
랩탑컴퓨터를 치켜들고 힘껏
내동댕이쳤다.
거센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분노로 인해 온몸이 떨려왔고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속았다! 이용만 당한 것이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 깨끗하게 당하고 말았다. Q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고 제거 지시를 내렸을
때 이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어야 하는건데, 좋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내가 살아남는 길은
돐제거하는 길뿐이다. 천사를
찾아라! 테이타 뱅크를 통하면 어쩌면
쉽게 천사를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전쟁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른 흥분이 온몸을 파도치듯
훑어나갔다.
그는 즉시 전화통에 매달려 부하들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가
아무리 수소문하고 애를 태워도 도무지
부하들의 소재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전화통을 팽개친 그는 한달음에 밖으로
내딛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나서 5분 정도 지났을까?
진분홍 드레스 차림의 오키노가 안방으로
들어섰다.
깨어진 컴퓨터의 파편으로 페허처럼
황폐해진 휑뎅그렁한 방 안의 풍경을
살펴보고 그녀는 이내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으며 화장대에 걸터앉았다.
외출채비를 서두르는 듯 머리채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놀림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그녀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묘한 여운을 머금은
웃음이었다.
이윽고 몸단장을 마친 그녀는 옷장에서
정장을 한 벌 꺼내어 갈아입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듯한 가방을 꺼내어
챙겨들고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진 지 10여 분 후. 이번엔
백합이 다시 들이닥쳤다.
백합은 분노와 흥분으로 몸을 가눌 길이
없는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온 집안을
뒤졌다.
'이 여우 같은 년! 어딜 갔어?'
오키노를 찾아 헤매던 그의 눈길이
안방의 열린 옷장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맥이 빠지는 듯 털석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몸을 추스릴 기운도 없는 듯 맥이
풀린 시선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오키노가 천사였다니, 그것은 꿈에도
상사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쩐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일이 순순히 잘
풀린다 했더니. 이제 보니 모든 건
계획적이었다. 천사가 자신의 동태를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건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년을 잡아야 한다. 반드시 붙들어서
요절을 내어야 한다.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이 여우 같은 년이 어느새 눈치를 채고
달아나다니.
그는 좀더 일찍 데이터 뱅크에 조회를
해보지 못한 것이 뼈가 저리도록 후회가
되었다.
집을 나서는 길로 데이터 뱅크를 찾아간
그는 천사의 전자사서함 호출부호에 대한
확인부터 서둘렀다.
그랬더니 이제 웬일인가. 천사의
호출넘버가 바로 자신의 저택이 소재지가
되어 있질 않는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그는 대뜸
별채의 방 한 칸을 덮쳤다. 그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프랑스제 샤넬 No.4의 향기가
코를 확 찔렀다. 이것은 오키노가 즐겨
사용하는 향수였다.
그리고 그의 눈을 뒤집어 놓은 것은 방
중앙의 탁자 위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랩탑
컴퓨터였다.
그는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꼭두각시처럼 그녀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분통이 터졌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년이 더 이상 멀리
숨어버리기 전에 잡아내야 한다. 문득
몸을 일으킨 그는 다급하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한편,
백합이 애타게 찾고 있던 심복 4인조는
윤정님의 손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왕궁의 피습사건이후 개점휴업상태가
되어버리자 절호의 기회라고 느낀 정님은
국희를 꼬드겨 사내들을 집으로 유인하는
계획을 세웠다.
큰 일거리가 하나 있는데 잘만 해결하면
일확천금이 생긴다는 유혹에 사내들은
너무 쉽게 걸려들었다.
마침 경찰수사와 취재기자들의 집요한
공세에 적당히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던 그들에겐 안성마춤의
유혹이기도 했다.
국희를 밖으로 따돌리고 사내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정님은 우선 주안상부터
올렸다.
처음엔 용건부터 재촉하던 사내들은
정님의 애교있는 몸짓에 제법 호기를
부리며 술잔을 받아들었다가 잠시 후 모두
의식을 잃고 말았다.
강력한 수면제를 탄 맥주 한두 잔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준비해둔 가스총은 써볼
필요도 없었다.
사내들이 인사불성이 된 걸 확인한
정님은 서둘러 다음 동작으로 옮겼다.
준비해둔 철사줄로 사내들의 손을 뒤로
돌려 묶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양발을
다시 묶고 그 위로 다시 반창고로 칭칭
감았다. 이 정도쯤 되면 항우장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작업은 10여 분만에 간단히 끝났다.
정님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씻어내었다.
사내들은 손과 발이 조이는 통에
고통스러운 듯 이따금씩 몸을 뒤틀었다.
그때마다 정님은 움찔 놀라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님은 이번엔 사내들의 입을 반창고로
봉해 버렸다.
덩치 큰 사내들을 끌어내느라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는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쉬지 않고 다음
동작으로 옮겼다.
가위를 집어든 그녀는 이번엔 사내들의
옷을 갈기갈기 도려내기 시작했다.
누더기처럼 변했던 사내들의 옷을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서 잠시 후 사내들은
모두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소동 속에서도 사내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내가 당했던 빚은 철저하게 갚아준다.
정님은 조금씩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추스리면서 입술을 앙물었다.
신혼 첫날밤의 끔찍했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치가 떨리는 원한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듯했다.
정님은 준비해둔 도구들을 방 한가운데
차곡차곡 늘어놓았다.
칼, 전기인두, 송곳, 집게 등 보기에도
끔찍한 기구들을 그녀는 나름대로
준배해 놓고 있었다.
사내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가
준비를 완료하고서도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사내 하나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본
정님은 사내들에게 물 한 양동이를
퍼부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몸을 일으키려던
사내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아 버둥대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몸부림이 계속되자 정님은
몽둥이로 그들을 후려갈겼다.
이윽고 모든 걸 체념한 듯 몸부림을
멈춘 그들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당황의 빛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꼴이 되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그들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년,
풀려만 나면 보자. 당장 요절을 내어 뼈를
갈아 먹어버릴 테다. 그들의 눈빛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네 놈이 뱀눈이지?"
정님은 놈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꼽히는
눈이 실처럼 가느다란 사내의 심벌을
몽둥이로 쿡쿡 찔렀다.
사내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불꽃이 튀는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흐흥, 아직 반항할 힘이 남아 있다 이
말씀이로군."
그녀가 힘을 가해서 다시 한 번
내려치자 몸을 크게 떨던 뱀눈은 사지를
쭉 뻗고 말았다.
정님은 의식을 잃은 뱀눈의 몸 위로
다시 물을 퍼부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린 뱀눈은
더이상 적개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던 다른 세 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는 애원의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 뱀눈! 네가 대답해 봐! 내가
누눈지 알겠어?"
뱀눈의 실 같은 눈빛에서 한가닥 의혹의
빛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정체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묵묵히 그들을 내려다보던 정님은
마음을 정한 듯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이며 그녀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잠시후 마지막 팬티 한 장을 벗어버린
그녀는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들의 눈 앞에 우뚝 섰다.
미끈한 나신의 여체가 눈 앞에 나타나자
사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들의 사내가 팽창을 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정님은 그들의 사내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의 사내는 금세
풀이 죽어 오므라들고 말았다.
사내들은 고통스런운 듯 다시금 몸을
뒤틀었다.
"자, 뱀눈. 대답해 봐. 이래도
모르겠어?"
의혹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뱀눈의 사내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흥, 한 여자의 일생을 짓밟아 놓고도
너희들은 강물에 가랑잎 한쪽 흘려
보내버린 듯 무심할 수 있었다 이거지?"
사내들의 눈에서 더욱 의혹의 빛이
스쳐갔다.
"나는 올해 봄, 정확하게 4월 10일,
신혼여행을 갔다가 제주도 하야비치
호텔에서 네 놈들에게 무참하게 능욕을
당하고 남편까지 잃은 윤정님이다"
순간, 사내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그리고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그들의 몸뚱이는 더욱 심한 공포와 전율로
한층 더 떨고 있었다.
"자, 말해 봐, 뱀눈! 우리 그이를
살해한 건 네 놈들이지?"
윤정님은 한걸음 다가서며 표독스런
눈길로 뱀눈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뱀눈은 멍한 얼굴로 그녀의 아래
위만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금 탐욕의 미소가 서렸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표독스럽다기보다는
처절한 아름다움과 애처로움을 갈무리한
천사에 다름없었다.
내가 왜 진작 몰랐을까? 이 여자에게
이런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었다니,
뱀눈은 멍하니 윤정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사나운 손길이 그의 빰을
세차게 후려 갈겼다. 퍼뜩 정신을 차린
뱀눈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가늘게
몸서리를 쳤다
독을 품은 듯한 그녀의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네놈들이 내가 여자라고 얕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맛을 보여주지,
여자의 가슴에 한을 품게 만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말이야."
정님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도구들
중에서 날이 시퍼런 칼을 집어들었다.
순간 사내들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똑똑히 말해주지, 나는 더이상 살아갈
의욕을 포기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대답을 하든말든 상관 않겠다.
그 대신 내 뜻을 거스를수록 너희들에게
돌아가는 건 참담한 고통과 결국은
죽음뿐일 것이다. 대답하겠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그렇게 하면 입을 봉한
반창고를 뜯어주겠다."
정님은 시퍼런 칼날을 들여다보이며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내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다. 이건 너희들 스스로가 택한
길이다. 우선 그 벌로 네 놈들이 함부로
휘둘러대는 그 막대기부터 잘라
버리겠다."
순간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일순
경악에 가득찬 공포와 설마하는 기대감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그들의 눈가를
스쳐갔다.
그러나 정님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먼저 뱀눈의 사내를 움켜쥐자 사내가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에선 더이상의 항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정님은 여유있게 심벌의
한가운데를 칼로 그어버렸다.
뱀눈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몸부림을 쳤다. 다른 세 사내들 역시
경악에 찬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들이 애원의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냉정하게 손을 휘둘렀다.
순간 방 안에는 심벌을 잃어버린
사내들의 처절한 몸짓과 피비린내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건 네놈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엄벌이자 보복일 뿐이다. 그리고 이건
맛보기야. 너희들이 내 질문에 순순히
응한다면 병원으로 실려가서 접합수술을
받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꾸물거리다가는 수술은 커녕
너희들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것이다. 자,
이번에도 거부하면 이번에는 한쪽 눈을
뽑아버리겠다."
순간 사내들은 고통 속에서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님은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우선
입을 봉한 반창고를 뜯어내었다.
"이 개 같은 년! 두고 보자!
풀려나가기만 하면 네 년을 박살을 내어
씹어 먹어 버릴 테니까!"
입이 자유롭게 풀리자 마자 뱀눈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리고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해
주겠다. 빨리 물어 봐라!"
뱀눈은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듯 이를
악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희들이 우선 신혼방에 침입한 것은
계획적이었지?"
"그렇다."
"누가 시켜서 한 짓인가?"
"그건..."
순간 뱀눈의 눈빛을 주춤 모았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정님이 다시 반창고를 집어들자 뱀눈이
급히 입을 열었다.
"마, 말하겠다. 그건 우춘구가 시킨
것이다!"
"뭐라구?"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어이가 없는 듯
정님의 손길이 문득 멎었다. 그리고
냉소를 흘리며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본 모양이군."
뱀눈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건 정말이다. 못 믿겠다면 옆에
애들한테 물어 봐! 이건 사실이라니까!"
옆의 세 사내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는 진실이
서려 있었다.
"그럴 리가... 우리 그이가 너희들을
쳐나를 윤간하게 만들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정님이 눈빛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뱀눈은 애원하듯 정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말투는 어느새 고분고분하게 변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그이는 누가 죽였어?"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뭐라구?"
"우춘구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뭐야?"
"믿을 수 없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그
당시는 우춘구 씨는 저희들의
보스였습니다."
"보스라니? 그럼 그이가 깡패두목이었단
말이에요?"
뱀눈은 씁쓰레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만 우춘구
씨가 어떤 조직의 중간보스였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그의
수하에서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조직? 그게 무슨 조직이죠?"
"저희들도 정확한 규모나 조직의 확실한
정체는 모릅니다. 그러나 거대한 세계적인
조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조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배신을 할
수 없고 철저하게 복종을 해야 합니다.
역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가 자살을 한 이유가
뭔가요?"
"우춘구 씨는 그때 이미 조직의
상부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하고 있었고 그
이유는 조직의 불문률을 깨뜨리고 거액의
자금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정님은 퍼뜩 짚히는 데가 있어 그의
말을 잘랐다.
"가만, 자금을 착복하다니? 그건 무슨
뜻인가요?"
"저도 정확한 사실은 모릅니다만 우리
조직은 우리사회의 지하경제에 깊이
관여하여 엄청난 재산 축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정한 돈이나
음성적인 거래를 캐어 우리 수중에
P끌어들이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죠. 물론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협박과 함께 온갖
계략이 다 동원됩니다. 그런데 우춘구
씨는 조직에 알리지 않은 채 건수를 하나
올렸고 그게 조직의 상층부에 발각이 된
거죠."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듯 한 발짝 뒷걸음질치던 정님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뱀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상부로부터 징계 지시가 내려온 것은
바로 결혼식날 아침이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우춘구 씨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조직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자 자신의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3발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윤정님 씨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뭐라구요? 나를 무참하게 짓밟아 놓는
게 마지막 배려였다구요?"
정님은 분노에 찬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렇습니다. 조직은 우춘구 씨의
부인인 윤정님 씨까지 희생물로 지정하고
있었으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의 목숨은 아직까지
붙어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끈질기게 남편의 죽음을 규명하고자
추적해 들어왔습니다. 당혹한 우리는
당신을 협박하여 이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들려고 했어요. 당신의 목숨을 구해내는
길만이 한때 우리가 모셨던 보스의
죽음에 보답하고 충성을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막무가내인
고집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뱀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안면은 고통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옆의 세 사내는 과다하게 흘린 피로
인해 의식을 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이 있습니다."
뱀눈이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은 제발 비밀로
붙여 주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이 살아날
수 있고 우리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발."
정님은 대답대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뱀눈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차근차근 몸에
걸친 정님은 김석기에게 전화를 넣었다.
마침 자리에 있었던 듯 김석기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저예요..."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님 씨! 정님 씨! 말씀하세요.거기
어딥니까?"
김석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정님은 잠시 감정을
억제하고 말문을 열었다.
"절 폭행했던 사람들을 잡았으니 경찰에
연락해서 데려가세요. 그리고 구급차도
함께 보내 주세요. 이 사람들 모두
위급해요. 병원에 데려가서 수술부터
받아야 할 거예요. 그리고 문초해 보면
아시겠지만 이 사람들이 바로 성기용의원
테러사건의 주범이에요."
그리고 정님은 자기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거기 꼼짝말고
계십시오."
정님은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 놓고
뱀눈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경찰이 달려와 당신들을 구해
줄 거예요."
뱀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체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소지품을 챙긴 그녀는 천천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아파트 현관을 막 내려 왔을
때였다. 늘씬하게 생긴 미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윤정님 씨죠?"
"누구신가요?"
정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노란색 투피스를 받쳐 입은 그녀는
한마디로 도발적인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로선 생판 처음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전 오키노라고 해요. 일명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사라고 불리워도 부족함이
없을 듯 싶었다.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절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방 안에 있는 쓰레기 같은
놈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구요."
정님은 흠칫 숨을 삼켰다. 경계의
눈빛을 느낀 듯 오키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님 씨를 해롭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다만 우춘구 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을 뿐이죠."
"좋아요."
정님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타라는 신호였다.
정님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녀는
운전석에 올라타 곧장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정님을 향해 방긋 웃어보이고는
차를 발진시켰다.
잠시 후 국립묘지 쪽으로 달리던
승용차는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올림픽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늘씬한 승용차는 생긴 그대로
날렵하고 미끈하게 올림픽 도로를
미끄러지며 달렸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굴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궁금증이 더럭 치밀었지만 그녀는
조바심을 꾹 누른 채 묵묵히 차창으로
흐르는 풍경에만 눈길을 주었다.
한참 후 승용차는 번잡하던 고속도로를
벗어나 미사리의 강변도로를 달렸다.
거기에서 또 한참만에 좌측으로 꺾은
승용차는 구불구불한 비포장길을 달리다가
시야가 탁 트인 한강 모래사장 앞에서
멈추었다.


16. 에필로그
"당신은 누구시죠?"
묵묵히 강물을 지켜보고 있던 정님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여전히 환한 미소로 그녀에게 답해
주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당신도 조직의 일원인가요?"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씀해 주세요. 제 남편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는 건 뭐죠?"
정님은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전 윤정님 씨가 우춘구 씨에
대해 불필요하게 나쁜 감정이나 기억을
안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건 무슨 뜻이죠?"
"우춘구 씨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한 번의 실수를 그는 현명한 처신으로
상쇄시켰어요. 조직에서도 더 이상의
보복은 없다는 걸 약속합니다. 단 윤정님
씨가 더 이상의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입니다."
정님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이윽고 침묵을 깨뜨린 건 정님쪽이었다.
"그게 모둔가요?"
"네."
"..."
"정님 씨는 현명한 분이라 믿어요.
인간의 능력이란 무한대이면서도 일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순도 안고 있어요.
더구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과 맞설 때는 더욱 그래요. 이 세상에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듯이 혼자서
거대한 조직에 맞서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춘구 씨의 선택에 윤정님
씨가 더이상 저항하지 않기를 바래요."
"잠깐만, 제 신분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됐죠? 또 제가 그 아파트에 묵고 있는
것까지."
"호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건 아무것도 숨길 수 없어요. 혹시
나중에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거나 우리의
조직에 관심이 있다면 국회편에 연락을
하세요."
순간 정님은 얼이 빠진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 가실까요?"
"먼저 가세요, 전 여기 남아 있겠어요."
그녀는 두말않고 승용차에 올랐다.
그리고 차를 돌려 급히 오던 길을
달려나갔다.
정님은 그녀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한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럴 수가 없어, 조금 전까지 느꼈던
우춘구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이 어느덧
가슴 한자락에 참담한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까
마음은 한결 편해지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춘구의 죽음을 규명해 보겠다는,
남편의 명예를 회복시켜 보겠다는,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 온 대명제가
물거품이 된 지금, 그녀의 마음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고
방향을 잡지 못해 허우적대어야 했다.
한편, 윤정님과는 달리 김석기와
손삼수는 일대 개가를 올리고 있었다.
윤정님의 아파트에서 중태에 빠진
백합의 하수인들을 체포하여 경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긴급 수술과
치료를 시키는 한편, 백합을 잡기 위해
전국에 지명수배 전통을 때렸다.
백합에 대한 혐의는 완벽하게 쥐고
있었다.
손삼수에 의해 체포된 남철희박사의
자백으로 인해 백합의 끄나풀로 밝혀진
홍성국박사 역시 체포되었고 남철희박사가
빼돌린 중요기밀과 그 기밀을 사들여
엄청난 소득을 올렸던 여러 기업들이
잇달아 입건되는 연쇄파동으로 나라 안은
불을 쑤신 듯 온통 들썩거렸다.
김석기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특종을
연속 터트려 신문사로부터 엄청난 포상을
약속받았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백합의 행적을 뒤쫓던 경찰은
묘령의 여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서해안의
끝섬에서 백합을 사살하였을때 사건의
열기는 클라이막스를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제보를 한 여자의 신원이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백합을 체포하기 위해 해양경찰대 2개
중대가 끝섬을 덮쳤을 때 백합의 저항은
처절의 극을 달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백합과 10여 명의
수하들의 발악적인 저항으로 경찰의
사상자도 상당수 발생했으나 만 이틀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백합과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울렸다.
그러나 전투결과의 노획품에 경찰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끝섬이야말로 우리나라 최대의
마약본거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백합이 20여 년에 걸쳐 공들여 가꾸었던
대마초 및 각종 원료 생산을 위한 농장은
백일하에 파헤쳐지고 쑥밭이 되고 말았다.
더욱 세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마약재배에 동원된 인부들은 철저하게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납치되어온
부녀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번 끌려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끝섬은 글자 그대로 죽음의
섬이었다.
그리고 무장한 감시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감시당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반항하는 무리들은 마약중독자로 폐인을
만드는 참혹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했음도
잇달아 밝혀졌다.
실종되었던 성기용의원의 여비서
정지숙이 마약중독자가 되어 발견된 곳
역기 끝섬이었다.
글자그대로 지옥과 다름 없었던 끝섬의
비밀을 파헤치고 사건시리즈를 마감한
김석기가 한숨을 돌린 것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이었다.
센세이셔널한 기사로 세인의 심금을
울리고 사회의 반향을 일으켰던 그도
우춘구와 연관된 기사는 가급적
기피하였다.
그것은 그가 사건 시리즈를 시작할때
걸려온 윤정님의 부탁 전화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미처 모르고 있던 사건의
전모를 귀띔해 주면서도 기사화하는데는
극력 반대를 하고 나섰다.
김석기 역시 아쉬움은 남았으나 그녀의
안전을 위하여 관련 기사만큼은 다루지
않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그녀와의 연락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시골에서 당분간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전화 이후 그녀는
정말 그림자조차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시리즈를 연재하는 틈틈이 그는 정님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줄을 넣고 뛰어
보았으나 헛수고로 그치고 말았다.
백합이 사살되고 국내 최대의 마약
밀매단이 일망타진된 후, 세인의 기억에서
사건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선 한 사람의 입국과 또 한
사람의 출국이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먼저 입국한 사람은 홍해강철그룹의
유재택사장이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온 유재택사장은
마중나와 있던 성기용의원의
안희갑보좌관, 그리고 김두태 비서실장과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리 약속이 된 듯 급히
발걸음을 2층 출국장으로 돌렸다.
출국장의 출국 게이트에는 홍콩행
케세이 퍼시픽 304기편의 개찰이 막
개시되고 있었고 그들은 급히 개찰구로
다가갔다.
개찰구옆 한쪽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묘령의 여인이 몸을 일으켜
유재택사장을 맞았다.
그녀가 바로 오키노로 통하던 천사였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유재택이
그녀의 가냘픈 손을 꽉 쥐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재택이 먼저 말문을 열었고, 그녀는
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의 만남은 그걸로 그만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서로 나누던 그들의
만남은 그녀가 손가방을 들고 등을
돌림으로써 끝이 났다.
그녀가 출국 게이트로 사라진 후
유재택사장 역시 등을 돌렸다.
그들의 짧은 만남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유재택사장은
흡족한 기분으로 대기하고 있던
벤츠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이틀 후.
정확히 말해서 천사가 출국하고 나서
이틀 후의 아침.
어젯밤의 숙취로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자리끼로 달래고 눈을 부비며
배달된 아침 신문을 펼쳐들던 김석기는
경악이 가득한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신문의 1면 톱기사는 대대적인
정계개편을 알리고 있었고 1면 전체를
해설기사에 할애하고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나는 듯 눈을 뜨고 신문을
훑어보던 김석기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럴 수가"
뜻밖의 충격에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정계개편은 오래 전부터 짐작되어 오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개편 폭이 너무 방대했을 뿐
아니라 개편의 내용은 너무나 파격적이
아닌가.
성기용의원의 전성기에는 기를 펴지
못하고 비주류의 한직에서 맴돌고 있던 모
인물이 파격적으로 국무총리에 중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로 불리던 인물들이
대거 실세로 요직에 중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성기용의원의
보좌관 안희갑이었다.
안희갑은 뜻밖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고 그것은 예상의
허를 찌르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안희갑은
모인사의 숙적이나 정적이었던
성기용의원의 보좌관이 아니었던가.
해설기사는 대화합의 원칙 아래
이루어진 인사라는 설명을 달고 있었지만
김석기로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다음 경제면을 들치던 김석기의 손길이
또 한 번 굳고 말았다.
정부 주도 하에 이루어지던 산업 합리화
정책이 거의 결정단계에 이르렀고
홍해강철그룹을 중심으로 중공업분야를
재개편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기사가
대뜸 그의 눈길을 끌었다.
'이건 애드벌룬이다.'
김석기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예측기사를
펼쳐놓고 허탈한 심정이 되어 앉아
있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회면 톱은 그의
기명기사 사건시리즈 마지막회가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 이 사건들은 오늘의 이런 결론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공략에 불과했던
건지도 몰라.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허수아비처럼
놀아났을지도 모른다는 허탈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면 그것은 기어코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반드시 윤정님을 찾아 내어야
한다. 윤정님의 신혼여행이 무참하게
깨어지면서 시작된 이번 사건이
정계개편으로 막을 내릴 수는 없다.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윤정님을
찾아내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한 아녀자의 나약한 힘이, 천사의
반란이, 이 사회에 청량한 반향을 던질수
있다면 천사는 반란을 일으켜야만 한다.
김석기는 또 다시 할 일을 찾아내었다는
듯 이부자리를 박차고 활기차게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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